우리나라 사람들은 엄마 이야기를 하다보면 열에 아홉은 눈물을 글썽인다.
내 경우 눈물샘을 열게 하는 가족이, 엄마보다는 외할머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한창 정서적인 교감이 많이 필요하던 시기에 할머니가 엄마 아빠 역할을 대신 해 우리 자매들을 보살펴 주셨다.
할머니는 1918년 함경도에서 술도가를 하는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셨다. 병치레가 많았던 할머니는 온실 속 화초처럼 귀하게 자라셨단다. 내게 외 고조, 증조 되시는 어르신들은 넉넉한 만큼 많이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챙기셨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인민군이 소위 있는 집안 사람들을 끌어다가 인민재판을 통해 거의 다 총살하고 재산을 빼앗아 갔다.
할머니 가족도 심판대에 섰다. 그런데 동네 주민들이 저분들은 우리를 먹여 살려 주신 정말 좋으신 분이니 제발 살려달라고 성토를 하여 재산은 몰수당했으나 목숨만은 부지 할 수 있으셨단다.
시기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중국에서도 살았다 하셨다. 장개석이랑 이웃이라 친했는데 그 분 참 멋진 분이셨다고 추억하시기도 했다. 나는 나중에서야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장개석이 장제스라는 걸 알고 신기했다.
고달픈 피난생활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산 역사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입으로 자주 듣다보니, 내게는 잠 안 오는 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전래동화 같았다. 배타고 도망가다 인민군 검열에 걸려서 손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백설기 떡 안에 쑤셔 넣어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 동굴에 대피해 있는데 안에서 포가 터져서 할머니 앞뒤로 다 죽고 혼자 간신히 살아남으신 일화 등 나는 재밌게 듣고 할머니는 눈가가 촉촉하셨다.
피난민 할머니는 지인의 소개로 평안도 분인 외할아버지를 만나 가정을 이루셨다. 힘든 시절에 아이를 여럿 잃으셔서 울 엄마가 첫째가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터를 잡으셨다.
세월이 흘러 엄마 삼촌 이모들 모두 결혼을 하고 외할아버지는 세상을 뜨셨고 손주들이 태어났다. 이 때부터 내가 기억하는 '슈퍼우먼' 할머니의 역사가 시작된다.
할머니는 우리집 손녀들을 건사 하셨다. 새벽에 일어나셔서 아침밥을 하시고 도시락을 식구대로 다 싸시고 간식, 빨래, 청소, 설거지 등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대가족 집안일을 모두 해 주셨다. 어릴 적 내가 봐도 일밖에 모르고 철이 없던 엄마는 할머니 일을 돕기는커녕 양말 하나도 벗은 자리 그대로 두는 철부지였다.
그런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할머니는 불평하지 않으시고 우직하셨다.
우리집 일만 봐 주신 게 아니다. 인천에 살고 있는 삼촌과 이모들이 SOS를 칠 때 마다 친히 출동 하셔서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주고 오셨다.
부산 인천을 오가실 때 할머니는 항상 통일호를 타셨다. 새마을호는 속도가 빨라서 어지러워 싫다고 하시고 무궁화호는 무슨 핑계로 싫다고 하신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당신은 통일호를 좋아하신단다.
한 푼이라도 아끼시려는 귀여운 변명이다.
기차를 탈 때는 역에 한 시간도 넘게 미리 도착 하셨다.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넉넉하게 가야 한다고 하셨다. 전쟁을 겪으면서 몸에 밴 생활 패턴 같았다.
할머니는 육중한 몸으로 참 부지런하셨다. 그 무게를 버티는 다리가 성할 리가 없지. 뒤뚱뒤뚱 걷는 걸음걸이가 내게는 친근했는데 당신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이런 슈퍼우먼 덕에 우리 외가 손주들 열명 중 할머니 손을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는 할머니의 다정한 손녀였다. 다리도 많이 주물러 드렸고 얘기도 제일 많이 들어 드렸다. 자리끼도 내가 챙겨 드렸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시던 할머니는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흘러간 가요 테이프 감상으로 위안 삼으셨다. 나는 고복수, 현인 노래들을 곧잘 불러 드리곤 했다. 인정 많은 둘째라며 사람들에게 내 칭찬을 많이 하고 다니셨다.
내가 고3이 되던 해 6월이었다.
그 날도 할머니는 평소처럼 밤늦게 들어온 내 도시락을 받아 설거지를 하셨다. 당시 나는 건강에 문제가 생겨 수험생 생활이 힘겨웠었다. 잠깐이지만 할머니의 뒷모습에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