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밤 물결아래~'
가까운 친구와 소리 높여 언쟁을 하고 씩씩거리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수 성시경의 목소리로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내일이면 또 다시 반복될 일상. 아 정말 숨쉬기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 제주도? 그래 까짓 거 가자! 스마트 폰으로 바로 다음날 가는 비행기를 조회해서 예매완료. 참 편리한 세상이다.
복잡한 마음을 `버리러' 가는 거니까 최대한 가볍게 가야지 해놓고, 언제나 그렇듯 여행용 트렁크를 가득 채운 짐. 그걸 끌고 공항까지 가는 길이 제일 멀게 느껴진다. 집에서 출발 세 시간 전에 나서도 결코 여유롭지 않다. 이 과정이 귀찮아서 비행기 타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 나도 참 게으르다.
아가씨가 혼자 겁도 없이 무턱대고 제주를 가다니 싶겠지만 그곳에서 언제든 오면 환영해 준다는 고마운 지인이 있었기에 즉흥적으로 떠날 수 있었다. 황송하게도 공항까지 픽업도 와 주시고.
건드리면 눈물보가 터질 것 같은 마음으로 왔으나 내 우울함을 들키고 싶지 않다. 즐겁게 놀다 가는 밝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 치유는 혼자 마음속으로 알아서 하면 되지.
"저 유명 맛집 말고 현지 분들이 주로 가는 숨은 보석 같은 집들로만 먹거리 투어 하고 싶어요. 아는 곳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간판이 번듯한 음식점보다 해변가 허름한 해녀식당들이 무척 매력적이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거친 손으로 새벽에 갓 채취한 해물들로 손님을 받고, 해지기 전에 철수하는 가게.
전에 왔을 때는 인터넷상에 유명세를 타는 해녀촌을 갔던 터라, 줄서서 하염없이 기다렸고 가격도 현지 치고 비쌌다. 게다가 친절함 따윈 기대 할 수 없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해녀 어멍은 미소가 순박하고, 푸짐하게 차려 내 주시는 인심이 일품이다. 맛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간장이나 초고추장 없이 그냥 먹어도 싱싱하기 그지없고 짭조름한 것이, 입에 착착 감긴다.
뿔소라, 멍게, 문어, 성게알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 중에 제일 엄지를 치켜세우게 만드는 것은 서비스로 나온 자연산 돌미역이다. 나는 부산사람이라 기장미역의 신선한 맛을 잘 안다. 그런데 그것과는 또 다른 제주미역만의 존재감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 이거 제대로다." 더 어떻게 표현 할 방법이 없다.
바로 앞에 펼쳐지는 성산 바다, 코끝에 스치며 기분 좋게 비릿한 향기, 입안에 바다를 통째로 넣어 오물거리는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잔잔한 파도조차 없이 평안해진다. 멋지게 시 한 소절 읊조리고 싶은데, 초라한 내 사전에 시는 없나보다. 그저 가요 `제주도 푸른밤' 멜로디만 흥얼흥얼 나온다. 이게 힐링이지 별 거창 할 게 있겠는가.
제주는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와봤다. 그런데 올 때마다 변화무쌍한 날씨만큼 느낌이 다르다. 관광명소로 다니면 잔뜩 멋을 내고 사진 찍기 바쁜 육지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번엔 그런 곳은 배제했다.
건축공사 일을 하고 식사 오신 제주 사투리 구수한 토박이 분들을 곳곳에서 많이 접하다 보니 내가 객 같지 않고 주인 같은 느낌마저 든다. 여세를 몰아 어설프게 사투리를 흉내 내어 쓰다가 서로 못 알아듣고 어색해 지는 순간도 잠시 즐겨본다.
짧은 여정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서울의 지하철 안, 퇴근시간과 맞물려 앉을자리 없이 꽉 찼다. 사람들은 저마다 전화기만 붙잡고 있다. 공기가 탁하다. 나는 잠깐 꿈을 꾸고 온 것이로구나.
이런 저런 맛집 다 데려가도 미역이 최고였다는 나를 배웅하면서, 제주 지인분이 좀녀(해녀의 제주도 방언)가 직접 따서 말린 귀한 미역을 한보따리 안겨 주셨다. 집에 오자마자 `10분이상 물에 담가두지 말라' 는 조언대로 미역을 잠깐 불려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쫄깃하고 찰진 식감이 좁은 서울 집에서 먹어도 여전히 만족스럽다.
미역을 오독오독 씹으면서 그 전 며칠을 되돌아본다.
이번엔 친구 연을 끊는 한이 있어도 그가 정식으로 사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