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감서은의 싱글노트 1.

[배우 감서은의 싱글노트] 뽀삐와 호랑이, 그리고 괴물 

영화쪽 일을 하는 지인에게 캐스팅 건이 있으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캐스팅 소식은 언제나 설렌다. 부푼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 나가 만났다.
 
그는 영화 줄거리와 역할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못하겠노라 답했다. 그는 의아해 했다. 이걸 왜 마다하냐는 표정이었다. 
 
내게 주어진 배역은 아주 큰 개와 동고동락 하는 인물이었다. 거절의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특히 큰 개는 나에게 맹수와도 같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캐스팅은 급해 보였고, 거절일수록 빠르고 단호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불가함을 전했다. 고사 이유도 짧게 덧붙여 말했다.

계절이 몇 번 바뀌고 그때 그 분과 다른 일로 술자리에 동석하게 되었다.
술이 얼근하게 오른 그는 내 옆자리로 와서 마치 잠수사가 오래 참은 숨을 내뱉듯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근성이 없다느니, 헝그리가 없다느니, 뭐가 그렇게 잘났냐느니, 자기가 나였으면 찍다가 포기하더라도 한다고 했을 거라느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배우들이 무리한 요구를 받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때 거절을 하면 제일 먼저 돌아오는 말이 `근성이 없다' 였다. 그 말을 지금 다시 들으니 욱하는 게 올라왔다. 내가 근성이 없었으면 20년 가까운 무명 생활을 어떻게 견디고 살았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그 말에 좌지우지 되었을까. 

내가 캐스팅을 거절할만큼 개를 무서워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미취학 아동때 일이다. 우리집은 2층 양옥집이었다. 1층엔 우리 가족이 살고 2층엔 다른 가구가 살았다. 2층집 아들은 지능이 좀 떨어지는 아이였다. 그는 우리집 강아지 뽀삐를 예뻐라 해서 자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놀았다. 

그런데 그가 비행기를 태워 준다면서 우리 뽀삐를 2층에서 던져 버렸다. 생사를 오가던 뽀삐는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 후로 불행하게도 같은 일이 두 번 더 반복 되었다. 

뽀삐의 생명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뽀삐는 더 이상 예전의 사랑스런 강아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뇌에 이상이 생겼던 것 같다. 밤마다 늑대소리로 울부짓던 뽀삐는 성견이 되어서는 어마어마한 괴물이 되었다. 도사견용 굵은 쇠줄을 구해서 칭칭 묶어놓아도 밤만 되면 그것을 끊고 집안으로 들어와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우리 자매는 울며불며 화장대 위로, 피아노 위로 도망가는 일상이 반복 되었다. 그때 느꼈던 공포는 집안에 호랑이가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이런 개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빨이 날카로운 다른 동물들에게 옮겨갔다. 그래서 지금 나는 강아지도, 고양이도 만지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런 구구절절한 개인적인 사연까지 그에게 설명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너무한다 싶을 정도의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내 욕심으로 무리하게 그 촬영을 했다 치자. 영화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끼칠 민폐는 내 이력에 치명타가 됐을 것이다.듣고 있기 힘든 말을 들어내야만 하는 자리. 같이 맞붙어 봐야 득 될 것이 없다.  

그럴 때 내가 쓰는 방법이 있다. 내 눈의 포커스를 줌인하여 그의 입에만 맞춘다. 온갖 독설을 내 뿜는 그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파편이 튄다. 무슨 안주를 얼마나 먹었는지 치아 사이에 빨갛고 까만 것들이 지저분하다. 가끔 손으로 입을 훔친다. 

마치 눈물을 훔치듯 자신의 독설을 훔친다. 자기 눈 안의 대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의 티끌을 비난하고 있다. 계속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그래 그렇게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독설을 웃음으로 받아낸다. 

"나는 맞고 남들은 틀리다는 사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터뷰 형식으로 만들어진 공익광고가 있다. `그런 태도는 좋지 못하다는 걸 누구나 안다. 하지만 나도 가끔 그러는 것 같다. 다양한 생각이 존중 받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는 내용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는 속담이 말해 주듯이 누구나 사연이 있다. 
우리가 가볍게 하는 소소한 선택들부터 인생의 중대한 결정까지 백인백색의 역사를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