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김밥 한 줄 먹고 돌아다닌 날이다.
저녁 아홉시가 다 되어 귀가하니 배가 몹시 고팠다. 집에 밥이 없다. 급하게 허기를 달래 줄 구원 투수 라면을 끓이고 김치를 꺼내려다 멈춘다. `아 며칠 전에 김치 다 먹었지'
김치 없이 먹는 라면은 보타이 없는 턱시도 같다고 할까. 뭔가 밍밍하고 재미가 없다.
김치 대신 단무지나 장아찌 같은 짭조름한 반찬을 곁들여도 되지 않나 하겠지만 그건 마치 밥 없으면 빵 먹으면 되지 하는 격, 내 냉장고 안에 있을 리 만무하다.
자취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별 거 없는 냉장고라고 해도, 열어보면 김치랑 밑반찬, 채소 과일 한 두 종류가 있는 그림이 결코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부모님과 함께 지낼 때는 으레 거기 있는 것들이었는데, 막상 독립해서 보니 무엇 하나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없었다.
요리 할 때 기본이 되는 소금 간장 설탕 등도 일일이 내 손으로 구비 해 두지 않으면 없다는 것이 냉혹한 현실로 느껴졌다.
신경 쓸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엄마 화장지!" 하면 대령되던 화장지는 왜 그렇게 빨리도 사라지는지.
벗어놓고 며칠 지나면 세탁 후 반듯하게 개켜져 제자리로 돌아오던 향긋한 옷가지들.
먼지라는 게 이렇게 일주일만 걸레질을 안 해도 집 안에 뽀얗게 쌓이는구나…
언제나 공기처럼 누리던 모든 것들이 주부의 희생과 수고로움의 산물이라는 것을 그때는 피부로 느끼지 못했었다.
나는 차를 몰고 마트에 가서 가끔씩 장을 본다. 장바구니를 들고 주차장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어 보이는지. 짐보따리가 무거워 낑낑거린다. 그래서 어지간한 것들은 웹으로 주문해서 문 앞까지 배달을 받는다.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들은 더운날이나 추운날이나 일일이 먼 시장을 걸어 다니셨으니 오죽 힘드셨을까.
맞벌이 가정이 많아지면서 전형적인 성역할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우리집도 예전에는 엄마의 독박 가사노동에, 아주 조금 돕는 딸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빠가 다림질이나 쓰레기 분리수거, 무거운 장보기 정도는 맡아서 하고 계신다. 그래도 여전히 대부분의 집안일은 엄마에게로 향하는 게 현실이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 가족 구성원이라면 한번쯤 생각 해 보았으면 좋겠다.
지금 가정에서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 중 그 어떤 하나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다.
"나 비벼먹고 싶어" 하면 바로 준비되는 고추장이며 참기름은 물론이고 시원하게 마시는 주스, 단백질 지킴이 달걀, 비타민의 보고 제철 과일, 가끔 등장하는 아이스크림 등의 먹거리.
떨어지지 않게 제공되는 비누, 샴푸, 칫솔, 치약.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치우는 뽀송뽀송한 수건 등의 생필품. 아주 깨끗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유지되는 집안 위생.
일일이 열거 할 수도 없는 많은 일들을 가족 중 누군가 해내고 있다.
직장에서는 승진도 하고 인센티브도 받지만 집안일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이다.
보상도 없고 알아주는 이도 없는 끝도 없는 이 일을 오직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기꺼이 하고 있다.
주부가 아파서 누우면 집안이 엉망진창이 된다. 그때서야 그 가치를 절감하지만 또 금 새 잊어버리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따뜻한 말로 건네 보는 건 어떨까.
"장마철 다른 집 수건들은 냄새나던데 우리집 수건은 항상 좋은 향기나. 엄만 노하우가 뭐예요?"
"워킹맘이 뭐 이런 것 까지 손수해. 세탁소 맡깁시다. 그 정도는 내가 더 벌게"
"여보 이 무거운 것들을 혼자 사온거야? 고생했다. 다음부터는 나랑 같이 가요"
"우와 오늘은 초코빵을 사오셨네. 내가 딱 먹고 싶었는데, 역시 아빠는 센스쟁이세요."
"내 남편 설거지 솜씨는 프로야. 진짜 깨끗하게 잘 해. 난 참 결혼 잘했어. "
혼자인 나는 스스로를 격려한다.
지금도 잘 하고 있는데 조금 더 잘